언론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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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15.02.04 35면] “洛山寺 화재때 ‘장로라 소극대처’ 음해… 당시 순직하고 싶었다”|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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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29일 충남 금산군 남일면 신천리 봉황천 앞의 한 전원주택을 찾았다. 금산과 전북 진안군 경계지점에 위치한 인적조차 드문 시골이지만 수려한 산세와 아늑한 풍광이 예사롭지 않다. 진입로를 따라 야트막한 오르막길을 오르니 곧 널따란 텃밭과 ‘녹우정(綠友亭)’이라는 조그만 목조 정자, 유난히 넓은 창문이 돋보이는 99㎡(약 30여 평) 규모의 아담한 목조 주택이 눈에 들어온다. 맞은편 봉황산의 대칭형 산세와 냇가 조망이 그림같다. “어서 오세요”라며 반기는 집주인이 바로 조연환(67) 전 산림청장이다. 희고 깨끗한 낯빛에 날씬한 체구, 맑고 상냥한 음성, 나이보다 20년은 젊어 보이는 ‘동안’이다. 업무 스트레스가 없어서일까? 10년 전 기자가산림청 출입기자로 가까이서 지켜봤을 때보다 훨씬 안색이 좋아 보였다. 옆에는 조 전 청장과 평생을 함께해 온 부인 정점순(69) 씨가 역시 미소를 가득 머금고 서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좋은 사람을 만나다 보니 마음이 편합니다. 머리 염색한 것 빼놓고는 다 ‘자연산’이지요. 천리포수목원에서 3년 동안 근무하며 하루에 2만 보 정도 걸은 것도 ‘동안 비결’입니다.” 조 전 청장은 평생을 산과 함께해 온 사람이다. 산을 ‘어머니’라고 부른다. 호도 은혜로운 산이라는 뜻에서 ‘은산(恩山)’이다. 산이 베푼 은혜는 아직 갚으려면 한참 남은 빚과 같다고 했다. “원래 교사가 꿈이었지만 워낙 가난했습니다. 농고 임과를 다니던 3년 동안 학비 보조를 받기 위해 묘목관리 실습생을 했어요. 그런 인연으로 국가임업직 공채를 봐서 공무원이 됐지요. 고교 때까지는 어머니가 길러 주셨지만 공무원이 되고부터는 산이 나를 길러 줬지요. 산이 밥(월급)을 주었고, 삶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내가 힘들 때 넉넉한 가슴으로 품어준 것도 산입니다. 산은 어머니이자 밥통이요, 내 삶 자체였습니다.” 충북 보은의 가난한 9남매집에서 태어나 19세 때인 1967년 전북 무주의 국유림 벌목장 일선 9급부터 시작해 2006년 1월 산림청장에서 물러날 때까지 38년 4개월을 산림행정 공무원으로 일했다. 이후 생명의 숲 공동본부 상임대표를 거쳐 지난해 연말 공익재단법인 천리포수목원 이사장으로 3년 임기를 마쳤다. 현재는 민간 산림경영자를 양성하는 한국산림아카데미 이사장으로 활동 중이다. 오는 3월쯤에는 또 다른 변신에 나선다. 지난해 부인과 함께 170시간의 교육을 받고 산림교육전문가 자격증을 딴 그는 3월부터 ‘숲 해설사’로 변신한다. 태안 천리포수목원에서 부인 정 씨와 함께 매주 1번씩 ‘조연환, 정점순과 함께하는 숲과의 데이트’를 진행할 예정이다. 땀과 열정을 바친 숲에서 나눔과 봉사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봄이 마냥 기다려진다. 산은 그를 시인으로도 만들었다. 제4회 ‘공무원 문예대전’ 대상을 받은 그는 ‘시인정신’을 통해 등단한 어엿한 작가다. 시집으로 ‘그리고 한그루의 나무이고 싶어라’ ‘숫돌의 눈물’ 등이 있고 한국장로문학상도 수상했다. “금산에 살면서 월요일은 대전에 있는 산림아카데미 이사장실로 출근하고, 금·토요일은 전국 곳곳의 산림아카데미 실습현장에 강사 자격으로 동행합니다. 3월부터는 숲 해설사로 출근해야 하니 더 바빠지겠지요?” 매사에 열정적인 그는 일흔을 바라보는 요즘도 현역 때 못지않은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그는 일선 벌목장 담당 공무원에서 산림청장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영림서 6급 계장 자리가 평생의 꿈이던 그가 ‘공직의 유리천장’을 깨고 인생을 바꾼 것은 1980년 7급으로 서울 본청에서 근무할 때 겪은 ‘생활고’ 때문이다. “낯선 서울살이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사무관이 되면 살림이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에 뒤늦게 주경야독에 들어갔습니다. 기술고시 임업직 공부를 시작한 거죠.” “겨우 5명 뽑는데 대학도 못나온 사람이 무슨 고시냐”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지만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드디어 32세의 나이에 최고령으로 제16회 기술고등고시에 합격했다. 이후 12년간의 사무관 생활을 거쳐 과장, 국장, 차장을 역임한 뒤 참여정부 시절인 2004년 청장에 발탁됐다. 조 전 청장은 1970년대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이루어진 ‘산림녹화 신화’의 산증인이다. “1973년부터 치산녹화 10개년 계획을 추진했는데 산림녹화는 대통령이 챙기는 주요 국정과제였습니다. 임도가 없던 시절이라 묘목을 지게에 짊어지고 산꼭대기까지 오르내려야만 했어요. 밧줄로 몸을 묶고 절벽에 붙어서 곡괭이로 구덩이를 파고 흙을 져날라가며 나무를 심었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무릅쓴 인부들의 노력이 눈물겨웠지요. 결국 온 국민이 땀과 눈물을 흘려서 황톳물이 흐르던 민둥산을 푸르게 만든 것입니다.” 조 전 청장은 산림청 재직 당시 기억에 남는 일로 ‘백두대간 보호특별법’ 제정, 숲가꾸기 공공근로 사업 본격화, 수목장 도입, 숲 명예의 전당 건립 등을 꼽았다. “백두대간은 우리 선조들이 만든 고유의 산줄기 체계이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도입된 ‘산맥’이란 용어에 밀려 풍수나 미신으로 취급받았죠. 1990년대 중반 도로건설이나 광산개발로 백두대간 곳곳이 허리가 잘려 나가고 속살을 드러내며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이때의 좌절은 결국 차장 재직 때인 2003년 백두대간 보호에 관한 법률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키는 자양분이 됐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당시 이보식 산림청장을 보좌하면서 500만 명에 이르는 실업자 구제를 위해 벌인 숲가꾸기 공공근로 사업도 보람이 컸다. 1998년부터 2002년까지 5년 동안 총 5712억 원을 투입해 연인원 1554만 명의 실업자를 고용해 43만㏊의 숲을 가꾼 한국판 뉴딜 정책이었다. 경제 위기를 맞아 실업자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을 뿐 아니라 그동안 심어 놓고 돈이 없다는 이유로 가꿔주지 못해 고통받고 죽어가던 숲을 살려낸 1석 2조 사업이었다. “이 사업을 계기로 나무는 심어 놓으면 저절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가꿔줘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일깨우는 계기가 됐습니다.” 물론 자랑거리만 있던 것은 아니다. 청장으로 재직하던 2005년 4월 5일 식목일날 발생한 ‘양양 산불’로 낙산사가 소실된 사건은 아직도 큰 회한으로 남는다. “그날은 노무현 대통령을 모시고 수원 산림과학원에서 조림행사를 하는 날이었어요. 1년 중 산림청에서 가장 큰 행사인 셈입니다. 그런데 새벽부터 건조한 날씨 속에 강풍이 불면서 전국 40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산불이 발생한 겁니다. 당시 농림부 장관은 동해안으로 산불진화를 독려하러 가고, 저는 충남 서산 가야산으로 가야 했어요. 서산 불을 진화하고 다시 헬기로 속초로 갔는데 양양 산불이 어느 정도 진화됐다는 보고를 받고 다시 고성의 민통선 남방 민가가 타고 있는 곳으로 날아갔습니다. 그런데 진화됐다던 양양에서 뒷불이 다시 커져 삽시간에 낙산사를 집어 삼킨 것입니다. 당시 초속 25m가 넘는 강풍이 불어 규정상 이륙이 불가한데도 산불진화 헬기 조종사들을 독려해 목숨을 건 비행에 나서게도 했지만 거대한 화염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죠.” 1000년 고찰 낙산사가 잿더미가 되고 범종이 녹아내렸지만 시간마다 취재진들에게 소상히 현장 상황을 설명하며 성의껏 브리핑을 한 덕인지 산림청장의 진화 책임을 묻는 여론은 일어나지 않았다. “일부에서 내가 교회 장로라서 일부러 낙산사에 헬기를 투입하지 않았다는 모함을 제기했고, 어느 국회의원이 실제 그런 추궁을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하기도 했습니다. 청와대에서 면밀한 검토 끝에 당시 상황에서 청장은 지휘에 최선을 다했다는 판단을 했고, 억울함은 풀어졌지만 두고 두고 아픈 기억으로 남습니다. 당시 내 심정은 솔직히 현장에서 순직해 버리고 싶었을 정도였죠.” 2002년 건국 이래 최대의 산불이라고 기록된 ‘동해안 산불’로 고성에서부터 울진까지 7개 시·군의 산림이 타버린 사건은 그를 문학으로 이끌었다. “피땀 흘려 가꾼 숲이 타니 가슴이 답답했어요. 산불 현장에서 사투를 벌인 애환을 적은 산림공무원들의 수기를 모아 책으로 냈어요. 그 다음해 공무원 문예대전에서 대상을 받아 시인으로 등단도 했죠.” 정치인으로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인연이 각별했다고 한다. “대통령이 저를 좋아하셨어요. 어려운 성장기를 보낸 이력의 공통점이 눈길을 끌었을 수도 있겠죠. 정부대전청사에서 청장을 했던 유홍준 문화재청장과 함께 청와대에 들어가 식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조 전 청장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딱 한 번 ‘정치 외도’를 했다고 고백한다. 문국현 전 유한킴벌리 사장과의 ‘의리’ 때문이었다. “산림청 재직 시절부터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 캠페인을 같이 한 인연으로 만나 의기투합한 사이였습니다. 산림청을 그만두고 고액연봉을 받던 자리인 농협 경제연구소장을 할 때였는데, 2007년 대선에 창조한국당을 창당하고 출마한 문 후보가 고전하더라고요. 보다 못해 소장 자리를 그만두고 캠프에 들어가 딱 3개월 동안 공동 선대본부장을 해보았습니다. 당시 야권은 문 후보에게 끊임없이 단일화 요구를 해왔습니다. 그런데 친노 쪽인 이해찬 후보까지 나오는 바람에 문 후보의 인기가 확 꺾이더라고요. 짧은 기간이었지만 정치판의 온갖 현실을 생생하게 목격했지요.” 앞으로 산림행정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산림 복지, 치유, 휴양도 좋지만 숲을 숲답게 가꿔주는 노력을 계속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지금 우리 산림은 모가 빽빽한 ‘모판’이나 마찬가지예요. 빨리 논으로 이앙을 해줘야 해요. 그래야 우리도 독일, 일본처럼 가치있는 숲을 후대에 물려줄 수 있습니다.” 15년 전 ‘푼돈’으로 구입한 금산 오지의 돌멩이밭을 일궈 귀농한 그는 이곳 생활이 “에덴동산 같다”고 예찬론을 펼친다. “언젠가 한 그루의 나무로 돌아가겠지요. 그때까지 나무와 숲의 고마움을 알게 하고, 산이 베푸는 혜택을 알게 하는 길잡이 노릇을 하고 싶습니다.” 금산 = 김창희 기자 chki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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